일시 : 2018년 1월 31일 오후 8시
장소 : 수현재씨어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연극을 보면서 계속 떠오르는 단어는 '아름다움'이었다.
극 중 마리가 루벤의 엄마를 향해서
무엇이 아름다운지는 루벤이 판단하게 해 달라고 이야기를 한다.
어쩌면 눈을 뜨게 될 루벤에게
세상의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고 싶다는 엄마의 비뚤어진 마음은
누구보다 루벤을 사랑하고 도와주는 마리를 '아름답지 못하다'고 보게 하였고
그런 루벤에게서 마리를 떠나 보내기 위해 마리에게 엄청난 마음의 상처를 입힌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사랑한 아들 루벤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만다.
결국 마리는 루벤을 떠나고..
루벤이 눈을 뜨던 날 엄마도 세상을 떠난다.
이 연극에서는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
악마가 만든 거울 조각이 눈에 박히고 마음에 박힌 소년 카일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을 비뚤어지고 추한 것으로 보게 된다.
여기 등장하는 세사람 모두 악마의 거울 조각이 마음에 박힌 듯 살아간다.
여인(루벤의 엄마)
어쩌면 가장 깊숙이 거울 조각이 박힌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아들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이 아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깨닫지 못한다.
극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추론해 볼때, 루벤은 색깔이라는 개념조차 없을 어린 시절에 시력을 잃었던 거 같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아들이 보았던 세상을 기억하게 하면서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던 것 같다.
그런 루벤이 청년이 될때까지도 자기 몸 하나 씻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면서도
늘 불만을 터뜨리는 어린아이같은 통제불능의 청년이 된 것에는
엄마의 책임이 가장 클 것이다.
극 중에서 (사실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어두운 무대 한끝에서 책을 읽어주는 마리와 루벤을 가만히 지켜보며
그 주위를 배회하고 두 사람이 가까와 지지 않도록 애쓰는 엄마의 모습은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루벤에게는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마리였지만
엄마에게는 소중한 루벤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는
그저 루벤을 위해 고용한 흉측한 외모의 여자였을 뿐이다.
엄마에게는 루벤의 변화도 마리를 향한 사랑도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의 아들 루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엄마에게는 하찮고 추한 것으로 보였으니까..
나도 엄마이기 때문에, 내 아이에게 맹목적으로 내가 보는 것, 내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았나 모르겠다.
늘 조심하려 애쓰지만 쉽지는 않다.
마리
통제불능의 루벤에게 책을 읽어 주기위해 고용된 여자이다.
얼굴과 몸에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어서 늘 커다란 모자가 달린 긴 코트를 입는다.
극 중에서 마리는 책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긴다.
책 속에서 무엇인가 위로를 받는 것 같다.
안데르센이 불쌍해서 좋아한다는 마리..
루벤에게 진짜 아름다운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너의 손끝으로 느낀 세상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처음부터.. 루벤에게 솔직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극을 지켜보는 관객의 마음일 뿐..
평생 추하다, 흉측하다는 이야기만 들어온 사람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는 특히나 외모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평범한 외모나 작은 키도 루저로 인식되고
마치 숨겨야 할 범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사회에서 마리에게 '왜 솔직히 말하지 그랬어?' 라고 하는 것은 잔인한 요구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그런 사회가 되면 좋겠다.
최근 성추행을 당했던 여검사의 용감한 폭로가 화제가 되고 있다.
법을 지키고 집행해야 하는 검찰에서 성추행 같은 일들이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최고 엘리트인 여검사가 이것을 폭로하기 위해 그렇게 오랜 세월 고민했고
(물론 뭣같은 조직이 계속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그렇게도 애를 썼으니.. 그 동안 방법도 없었을 거 같다.)
또 '너의 잘못이 아니야.'란 말이 그렇게 듣고 싶었다는 말에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육체의 상처나 깊이 패인 마음의 상처.. 모두 움추러들고 숨게 만든다.
하지만 이 용기있는 고백이 자신에게 자유함을 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있는지..
마리도 수많은 책들 속에서 보아온 것처럼 자신을 그렇게 드러내고
루벤과 사랑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미 루벤은 손끝을 통해 마리 얼굴의 상처를 느꼈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의 카일은 마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연극은 마지막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동화처럼 루벤을 통해 마리 마음의 차가운 거울 조각이 빠져 나오길 기대한다.
루벤
처음엔 통제불능의 어린아이 같았지만 점차 성숙해 간다.
그 과정에 마리의 절대적인 노력과 헌신이 있었다.
비록 눈이 보이진 않았지만
마치 설리번 선생을 만난 헬렌 켈러처럼
손끝으로 세상을 알아 가면서 세상도, 마리도 아름답게 보기 시작한다.
눈을 떴을 때 마리가 사라진 이유를 알았고
그녀를 찾아갔지만 외면당하고 돌아온 후..
극단의 선택을 한다.
마리를 기다리면서..
마음이 아팠다.
루벤의 엄마는 자신의 삶을 바쳐 루벤의 눈을 뜨게 했지만
잘못된 모성으로 인해 루벤은 그 눈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이 망가뜨려 버렸다.
어찌보면 '엄마가 너를 위해 어떻게 살았는데.. 그럴 수 있니?' 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잘못된 모자 관계가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연극 캐스트에서도 '루벤의 엄마'라고 하지 않고 '여인'이라고 표현했을까?)
우리 사회에서도 부모와 연을 끊고 사는 자식들이 있다.
비난받을 일이긴 하지만 그들의 성장 과정에 부모를 향한 어떤 원망과 분노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쨋든.. 루벤은 마리를 다시 찾기 위해..
다시 마리의 아름다움을 손끝으로 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마치 '눈의 여왕' 속 게르다처럼.. 마리의 얼어 붙은 심장을 녹이기 위해서..
아마도.. 다시.. 만났겠지?
해피엔딩을 상상해 본다.
이 연극을 보는 내내 진짜 아름다움은 뭘까? 생각하게 되었다.
가끔 TV프로그램에서 얼굴이 심하게 다치거나 장애가 있는 분들이 나올 때
놀라기도 하고 사실.. TV에서 눈길을 돌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외모로 보지 말라고 하셨는데..
연약한 인간인지라 잘 되지 않는다. 역시 내 의지로는 불가능하다.
내 마음을 지켜 주시도록 성령님을 의지하고 기도했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찾는 것.. 그것이 아름다움인데
내 판단으로 그것들을 추하다고, 흉측하다고 말하고 무시할 때도 얼마나 많은지..
역시 나에겐 답이 없다. 하나님을 의지할 뿐이다.
배우에 대해서
루벤의 엄마(여인) 역의 이영숙 배우와 마리 역의 정운선 배우에게 눈길이 갔다.
굉장히 정적인 연극이지만 두 여배우의 부딪침이 꽤나 불꽃이 튄다.
시종일관 절제된 연기를 펼치다가
루벤에게 같이 떠나자고 필사적으로 말하는 정운선 배우의 연기에 빠져 들었다.
그때서야 진짜 자기 감정을 드러낸 것 같아서..
그 눈물에 마음이 아팠다.
마리가 좀 더 울고 자기 감정을 많이 드러낼 수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을 텐데..
좋은 연기 감사드려요~ 정운선 배우님~
박은석 배우는 예전 '마을 아치아라의 비밀'에서 인상깊게 본 터였지만 연극은 처음이었다.
처음에 아이같은 모습에서 조금씩 성장하는 청년의 모습을 잘 표현한 것 같다.
마지막을 위해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의 눈으로 본 마지막 풍경들을 기억 속에 담는 슬픈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자~알 생겼다. ^^
좌석은 12열 4번 S석,
수현재씨어터가 작고 단차도 좋아서 대부분 잘 보이지만
겨울 배경인 무대가 어두워서 배우들의 표정은 망원경을 가지고 관찰했다.
그리고 이상하게 소리가 잘 안 들리는데..
지난 번 연극 엘리펀트송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부분이라 이유는 잘모르겠다.
초반 후기들이 좋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많이 보완된 듯하다.
아주 정적이고 배우들의 몸짓과 표정으로 많은 표현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들의 몸짓을 자세히 보아야 한다. 집중력이 많이 필요한 극이다.
그리고 피아노와 현악기의 연주가 분위기를 잘 유도해 주었다.
어쨋든 많은 생각들.. 특히 자녀에 대해서,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 고마운 연극이다.
도서관에서 '눈의 여왕'도 빌려 보아야 겠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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